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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가볼리 신부는, 빈곤자와 병자들을 방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을 보다 인간답게 살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여 수용시설을 계획한다. 하지만 세계 공황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안고 있던 수도회의 이해를 얻는 것은 어려웠다. 하지만 가볼리 신부의 계획은 장상인 치마티 신부의 이해와 신뢰를 받아 진행되었고, 1933년 1월 12일 드디어 구호원이 발족되었다. 가볼리 신부는 구호원 운영을 위한 기부를 얻기 위해, 1933년 10월부터 약 1년 6개월간 이탈리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했다.

구호원에서 생활하며 무보수로 봉사할 여성들이 각지에서 모여 들었고, 후에 애자회로 불리게 되었다. 구호원의 운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수도회 설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치마티 신부는 가볼리 신부에게 이를 제안했다. 그는 식별한 후 그것을 받아들여 애자회를 모체로 한 여자 수도회를 설립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1937년 8월15일에 일본 까리따스 수녀회가 설립되었다. 1939년 1월 31일 2명의 회원이 첫서원을 하였다. 가볼리 신부는 회헌 작성과 회원들의 양성을 위해 힘을 기울였다. 1941년에 발발한 전쟁으로 인해 외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되었고 수녀들은 구호원을 계속 운영하기 위해 밤낮으로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의 수도회의 발전은 이 초기 회원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리하여 처녀회 회원들의 일은 놀라울 만큼 늘어났으며 복잡하고 더욱 다양해졌다. 음식 준비, 집안 청소, 세탁 등을 하고 노인이나 마비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며,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일까지도 해 나갔다. 또한 아이들을 깨우고, 밭을 일구며 산양의 젓을 짜고 가정을 방문을 하였다. 이런 일들을 그들은 즐겁게, 언제나 일본인 특유의 미소를 머금고 해 나갔고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 같았다.

(회상록『사업 개시의 시절』에서)



나는 아직도 자신이 없었으나, 신부님의 세 번째 권유를 받자 순명을 거스르게 될까 봐서 머리를 숙이고 베드로 사도처럼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장)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예”라는 이 대답으로 인해 얼마나 심한 고통을 겪게 될지, 그리고 이 수도회가 또 얼마나 많은 선을 행하게 되어, 나의 노후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될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회상록 『치마티 신부님의 아이디어』에서)



과로와 말할 수 없는 궁핍 때문에 가톨릭 묘지에는 6개의 묘가 새로 생겼다. 그것은 여섯 수녀의 묘지였다.

(회상록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에서)



‘까리따스 수녀회’의 수녀들은 오랜 전쟁 동안,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드문 신앙심과 용감한 애덕 정신으로 굳건해져, 다른 곳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노동과 극기와 희생을 지닌 사람들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극도로 궁핍함 속에서의 노동은, 겸손과 소박한 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회상록『발전』에서)